공간 대신 화면에서 만나기, 시선의 머무름 속에 살기
순간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때,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과 연관 지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로잡힌 추억의 충동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한 때 내가 있던- 어쩌면 그것마저도 사실 불분명한-곳으로 가서 있고 싶은, 그런 마음에 잠기기. 그렇게 본다면, 추억의 어렴풋함은 역설적으로 공간감과 무게감을 지닌다. 우리가 기억의 공간에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몸짓, 그것은 존재하기라는 궁극을 향한다. 이제는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러면서도 그떄 그곳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은 내가 몸소 있고 싶어하는 자리를 점유하면서 존재하기의 무게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기억의 공간은 순간을 오래 머무름으로 치환하게 된다. 이때 이미지는 충분한 공간감을 가지게 되면서 인간의 존재라는 무게감을 받아준다.
하지만 순간적인 이미지 중에도 존재의 공간감 대신 순간성에 집중하는 것도 있다. 이 순간적인 이미지는 접촉-무언가와 무언가가 잠시 만나 닿은 그 순간에 집중한다. 그것은 무언가 (존재와 곧, 그 존재의 행위)의 흔적을 담지만, 그 정체를 밝히지도 증명하지도 않으면서 남는다. 황은실의 그림은 존재 대신 시선의 순간적인 머무름을 향한다. 작가는 직접 촬영한 이미지와 SNS에 누군가가 올린 사진 중에서 캡처로 저장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캔버스 화면에 풍경을 그린다. 작가가 작업하는 서울이라는 곳에서 본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낸 시선의 단편들은 여러 개가 동시에, 심지어 부분적으로 그려져서 통합되지 않은 한 화면을 만든다. 카페, 길거리, 지나가다 본 장면들이 화면 전체에 그려지는데, 그것은 패치워크처럼 조각조각 구성된, 그러면서도 부분들이 겹치고 이어지는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작품이 풍기는 어렴풋한 분위기는 미래를 향하는 유토피아나 과거를 향하는 기억의 공간과 다르다. 유토피아적 시선과 추억의 시선- 아직 없거나, 이제는 없는 이상적인 장소로서 갈망의 대상이되는-처럼 동경의 대상은 깊이감을 가지면서 우리라는 존재가 머무는 자리를 제공한다. 황은실의 작품은 그와 달리, 시선을 빠르게 움직이고 잠시 포착한, 순간의 접촉면이다.
황은실의 회화 작업은 존재하기를 향해 열린 곳을 기억의 공간 대신 눈의 공간으로 삼는다. 작가는 그곳에 공간의 깊이감을 환영적으로 조성하는 대신 창을 만든다. 스크린샷으로 저장한 이미지들을 배치하는 과정과 작품에 나타난 풍경의 모습만 봐도 작가에게 창은 중요한 모티프이다. 그런데 창을 그린다는 표현 대신 만든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가 창문의 상반되는 성격, 즉 시선-공간의 통과와 차단을 물성을 가진 캔버스에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창문 내부에 보이는 것들은 들어갈 수 없는, 오로지 시선으로만 만나는 대상이다. 디지털 기기로 보는 이미지 또한 그렇다. 저장한 사진을 손가락으로 확대하는 동작이 그렇듯이, 물리적으로 차단된 거리를 우리는 손이나 시선으로만 접속할 수 있다. 캔버스 또한 마찬가지다. 내부가 뻥 뚫려서 보이지 않는 물성을 가진 캔버스는 그 화면 위에 붓질이라는 접촉의 감각이 올라가게 되면서 창이 된다. 작가가 회화 작업으로 보여주는 풍경은 물성을 가진 창문과 터치를 통해서 공간과 사물을 만나는 디지털 기기 사이에서 공명하는, 시선-공간의 통과와 차단에 유래된다.
흰 바탕에 부분적으로 그려지고 남겨진 흔적들이 보이는데, 그것은 마치 창에 손을 댔다가 손바닥 지문이 남는 것처럼 거기에 붙어 있다. 시선이 복수화되고 중첩되는 평면 앞에서 보는 사람은 공간에/의 머무름대신 순간적 머무름을 이미지로써 만난다. 공간에 있고 공간에 사는 것과 달리, 빠르고 민첩한, 과거와 미래를 그리워하는 일 없이 남긴 흔적들이 창문-캔버스의 물질성을 만날 때, 시선은 순간적으로 향하고 옮겨져 곧 이미지가 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작품에 남겨진 하얀 여백은 앞으로 공간적으로 펼칠 수 있는 여유나 자유로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화면이다. 무언가를 덧붙일 수는 있지만 그보다 더 멀리 뚫을 수 있는 물질적인 ‘(평)면’이다. 이 ‘(평)면'은 순간 속에 존재와 흔적이 이미지로 만나는 접촉면으로써 보는 사람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