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ures of Seeing : 시선의 질감들
여름은 고통스럽지만 풍성한 계절이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푸르름과 싱그러움을 마주할 수 있기에 몸은 힘들어도 눈만큼은 즐거운 계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은실의 그림 또한 생동하는 여름을 눈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가 캔버스에 옮겨낸 것은 뜨거운 햇빛 아래 끈적해진 피부를 훔치며 힘겹게 한 걸은 한 걸음 나아가는 여름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꾸며진 카페의 창 너머로 나무 그림자를 드리우는 햇살을 보거나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방 안에서 SNS 풍경을 스크롤하며 시간을 보낼 때 마주하게 되는 산뜻한 여름의 모습니다. 여기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21세기의 생동하는 삶, 부지런히 스크린을 훑는 눈과 거기서 본 것들을 향해 움직이는 신체가 교차하는 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과 연관된다.
오늘날 삶의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시선의 노동을 해야만 한다. 화면 속의 멋진 장소를 가만히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고, 몸을 움직여 그곳에 찾아가 다시 이미지를 생산해 낼 수도 있다. 황은실은 이렇게 끊임없는 눈의 노동과 간헐적인 몸의 움직이 사이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린다. “하루종일 눈으로 뭔가를 더듬고 있다"는 그의 시선은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생각하고 숙고한다. 특히 그에게 바라봄은 붓질이라는 언어로 세계를 번역하는 작업과도 같다. 보는 것은 곧 눈앞의 장면에서 그려볼만한 요소들을 추출해 붓질로 치환하는 상상이 되며, 때떄로 이런 상상은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그는 머릿속에서 다양한 질감을 경유하여 바라본다. 이는 산책하며 풍경을 볼 때나 아이패드를 스크롤하며 이미지를 볼 때에나 마찬가지다.
황은실은 스크린샷하듯이 풍경을 보고 산책하듯이 스크린을 보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스크린은 언제나 다음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는 화면이고, 현실도 마찬가지로 늘 다음 순간을 향해 흐른다. 그래서인지 그는 특정한 대상보다도 시선의 유동적인 움직임 그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가 자주 투명한 유리창을 그림의 기본 틀로 삼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관심사와 연결된다. 유리창은 안과 밖의 경계를 지으면서 동시에 그 사이를 매개한다. 안과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들은 반영을 통해 한데 섞이게 되며 관찰자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 창 바깥에서 안쪽을 바라보면 여러 개의 레이어가 혼재된 장면이 보이고, 그 장면을 관찰하고 있는 나의 모습 또한 그곳에 함께 있다. 이는 인용된 카뮈의 글에서처럼 “나 자신에게서 거리를 둔 초연함과 동시에 세계 속의 내 현존을 느끼는" 감각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최근에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혼재된 감각을 극대화하여 한 화면 안에 다양한 질감을 담아내는 것이다. 마치 리듬의 변주를 연구하고 체화하는 재즈 연주자처럼 그는 다양한 미딩머과 여러 종류의 붓을 사용해 가며 질감과 기법을 연구한다. 나이프로 두껍게 얹기, 얇은 선으로 묘사하기,수채화적인 질감을 얹고 캔버스를 눕혀 번진 모양대로 건조하기, 한 번에 매끄럽게 그리거나 저항감이 느껴지도록 그려내기, 그려낸 곳을 긁어내기, 때때로 모래의 질감을 섞기까지도 하나의 캔버스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그리기의 과정에서는 수집한 이미지들을 기반으로 그리되 직관적인 판단으로 많은 부분을 채우기도 한다. 단 그림마다 색의 사용 범위는 철저히 계획한다. 이처럼 캔버스 위에서 틀과 즉흥 사이를 오가며 줄다리기하는 황은실의 방식은 재즈의 문법을 닮았다. 그에게는 즐겨 사용하는 기법들과 자기만의 섬세한 규칙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때로는 더 대범하게 흐트러질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번에 전시된 그림들에서 섬세하게 계산된 즉흥의 미묘함을 맛볼 수 있다면, 앞으로의 그림들에서는 즉흥의 범주가 확장되어 널뛰는 리듬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황은실의 그림 앞에서는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감각은 무엇인지, 지금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고 생기 있게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다양한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여러 감각들을 체화할 것,피할 수 없는 스크린과 쇼룸에서 쏟아지는 자극 가운데 자기만의 미감을 편집해 내고 정제해 나갈 것. 다만 맨눈으로 풍경을 보고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는 순간을 잃지 않을 것. 이 모든 활동을 통해 자신의 리듬을 찾아 나간다면 지금의 삶도 꽤 괜찮을 수 있지 않을까.
글. 김명진 (독립 큐레이터)